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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사야 53:4-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431 추천수:6 112.168.96.71
2016-03-20 07:29:10

 

십자가(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이사야 53:4-6

 

제가 오늘 주보에 이해하기 쉬운 시 같지 않는 이야기 시를 한 편 써서 올렸습니다. “봄날/차를 타고/식사하러 가는데// 논술 학원 원장이/요즈음 아이들/조금만 야단치면 바로 안 나온단다.// 다른 아이들 때문에/천방지축인 아이들/야단치지 않을 수 없고......//그 말을 듣던/결혼한 아들 둔 엄마가/옛날 아이를 아가페 학원에 보냈는데//어느 날/아이가 아가를/패는 학원이라고 학원을 끊었단다.//그 말에/청중은 박장대소하는데/옆으로 아기 예수 품은 마리아상이 보이고//한 엄마가/지금 아이들/힘들게 하면 학원 안 간단다.//예전에는/손등을 때리며/피아노를 가르쳤는데//모두가/왕자 공주라/대접받고 재미있어야 한단다.//차창으로/사순절인데 예배당/꼭대기에 앉은 십자가가 유난히 빛난다.” 지난 주 심방을 하고 어떤 집사님께서 점심 식사를 대접한다고 해서 식당에 가면서 차 속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 시로 써 보았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 조금만 선생님이 야단을 치면 다음날 바로 학원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어 수학은 그래도 필수 과목이니까 조금 다른데 논술은 필수 과목이 아니라 어머니들도 아이가 싫다면 바로 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반하고 부담스러운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전반적인 추세입니다. 백화점이나 음식점도 종업원이 조금만 불친절하게 하면 다음에는 가지 않습니다. “손님이 왕인데” 왕처럼 대접을 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싫은 소리 듣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변해가는 인간상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런 21세기 인간의 자화상을 니체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합니다. 군중 속에 개성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군중은 메뚜기 떼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군중은 메뚜기 떼처럼 조그마한 먹이까지 달려들어 남김없이 싹 긁어먹는다는 것입니다. 금융위기로 월 스트리트가 파국에 도달했을 때도 경영자들은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연봉을 받고 보너스 잔치를 할 때 언론은 사리사욕만 채우고 공동의 가치를 내팽개친 이들을 일컬어 메뚜기 떼와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인간을 독파리로 비유합니다. 시장은 스스로 감추면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물건을 사고팔거나 상대방을 속이고 기만하기도 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가 30살에 산으로 들어가 10년간 세계의 이치를 깨닫고 시장으로 내려와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인간 유형을 보여주겠다. 그것은 다름 아닌 초인이다. 그런데 너희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은 최후의 인간관 같다.”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생명의 기원이나 인간의 기원을 신의 계획이나 설계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동물의 형상으로 진화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이 유인원을 초극하였듯이 초인(Übermensch)은 인간을 초극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신을 죽이고 그 자리에 초인을 앉혔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시장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여, 초인은 당신이나 되십시오. 우리는 기꺼이 최후의 인간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오늘 많은 사람들의 정직한 자기 고백일 것입니다. 과거는 공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삶의 양식도 추구했는데 이제는 개인만 중요하고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모의 도리도 무시하고 장애 자녀자 자신의 인생에 방해가 된다고 살해해 버립니다. 자식도 자신의 인생에 불편함을 주면 과감하게 부모를 버려버립니다. 원칙도 공의도, 양심과 돈과 자기 이익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니체가 말한 독파리의 삶의 양식 지배하며 천상의 가치가 붕괴되어 버린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장의 원리에 따라 이익만 추구하는 인간 같지만 사람은 절대적 사랑을 동경하고, 자기는 공의롭지 못하지만 공의를 지향하고, 근원적 가치를 추구하는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태양의 후예에 나오는 배우 송중기에게 사람들이 열광한다고 합니다. 심방을 가는데 한 목사님 딸이 송중기 팬이라고 해요. 그래서 그런가보다고 지나쳤는데 신문에 보니 <“송중기 ‘태양의 후예’ 매우 위험” 중국 공안 경고?>라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겨 읽어 보았습니다. 중국의 많은 소녀 팬들의 광적인 열광뿐 아니라 주위의 많은 여성들이 ‘송중기 상사병’에 걸렸기 때문”에 중국 공안이 경고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내의 송중기 사랑을 질투한 남편이 성형수술을 받는가 하면, 송중기에게 반한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진관을 찾은 남편이 ‘송중기와 똑같이 찍어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는 것입니다. ‘태양의 후예’를 몰아보던 한 여대생이 급성 녹내장에 걸려 실명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재미있게 만들었기에 그러는가 해서 인터넷 유튜브에 가서 태양의 후예를 찾아보았습니다. 다 시청하지는 못했지만 저도 보니까 참 재미가 있었고 잘 만들어지고 있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3편을 보았는데 왜 사람들이 그 드라마를 좋아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같았습니다. 불륜으로 점철된 3류 드라마가 아니라 이해타산에 따라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사랑이 아니라 이해타산을 초월한 원형적 사랑이 드라마에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힘과 야합하지 않고 절대적 가치를 지키려는 향수가 드라마에 스며 있는 것입니다. 원칙을 지키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불이익도 감수하는 희생과 정의가 드라마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시장화된 현대인의 마음에 아직은 동물적인 삶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는 열정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사는 사람에게 열광하는 순순함이 인간에게는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며 정의를 행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열광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드라마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에 열광합니다. 예수님은 33살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형을 당하였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은 노예의 몸값을 받고 예수님을 인신 매매 했습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제자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부당한 권력자는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어 자신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하게 합니다. 권력의 하수인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예수님에게 무지막지한 채찍을 가합니다. 예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면서 갈대로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며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일 최고로 잘 섬긴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 열심으로 사악한 권력과 합세하여 예수님을 불법자로 취급하여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일반인들은 극도의 고통과 극도의 치욕에 시달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대신에, 머리까지 흔들면서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면서 모욕을 퍼부었습니다. 왜 이런 수모를 당하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1.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4,5)

재미있는 드라마는 그저 즐기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실제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했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칠십 세에 자신의 주장 때문에 독배를 마셨고, 모하멧은 육십세에, 플라톤과 석가는 팔십세가 넘어서 죽었는데 예수님은 왜 33살 젊은 나이로 십자가의 처절한 형장의 이슬로 살아졌을까요?

4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며 죽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4)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무슨 죄목으로 예수님을 처형했습니까?

죄목은 로마인에게 있어서는 반란죄이고,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참람죄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요구하기를 "(요 19: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마 27: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써 붙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탐욕 때문에 제사장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제사장은 시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비겁함 때문에 군병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과연 예수님은 로마에 반역하는 반역 죄 때문에 돌아 가셨을까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죄 때문에 돌아가셨을까요?

예수님의 유다의 탐욕 때문에, 빌라도의 비겁 때문에 제사장들의 시기 때문에 돌아가셨을까요? 진정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 이유를 어떻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본문 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을 네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찔렸습니다. 가시 면류관과 못과 창 등으로 찔렸습니다. 상했습니다. 보통 상함이 아니라 뼈가 부스러지는 것 같은 상함입니다. 징계를 받았습니다. 채찍에 맞았습니다.

주님이 ①찔림의 고통 ②상함의 고통 ③징계의 고통 ④채찍의 고통을 당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 문제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무려 9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찔리고 상하고 징계당하고 채찍에 맞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그런 고통을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공생에를 시작하시는 것을 보고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생은 처음부터 인류를 위해 대속하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무엇을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짊어졌다는 말입니까? 마땅히 우리가 받아야할 무엇을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말입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질고란 질병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질병을 지셨다고 말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예수님이 질병에 걸렸다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우리가 앓는 질병 모두를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질병을 앓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질병에 걸립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일까요?

오늘 말씀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예언을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사 29:18-19)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 예언은 메시아가 오면 메시아의 능력으로 질병이 치유될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꺾어버리고 인간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는 질병을 메시야가 오시면 해결해 주실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7: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참된 행복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갖가지 질병을 치료 시켜 주셨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개인들을 치유한 기적은 적어도 26회 이상 나타나 있습니다. 38년 된 혈루증 환자가 낳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소경이 눈을 떴으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렸습니다. 오늘 날 병명으로 말하면 열병, 말라리아, 문둥병, 선천성 소경, 파킨스씨 병 ,신장염 , 관절염, 간질병 , 귀머거리, 신체장애, 정신병 등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치유 받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두려움 , 불안, 긴장 흥분, 불면증, 우울증 등과 같은 각종 신경성 질환자도 고침받았습니다. 기능장애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기관 장애가 고침 받았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질병이 변하여 건강을 얻는 길을 펼쳐 놓았습니다. 우리가 육체적 질병과 고통으로 근심하고 고통하지만 예수님께 나오면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질병 때문에 고통하고 있으신 분 있습니까? 육체의 고통 때문에 근심 걱정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마음의 고통으로 근심하며 사시는 분이 계십니까?

나의 질병의 문제, 나의 근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질병, 그 근심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십자가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를 안수하여 주셔서 우리의 질병을 낫게 해 주시고 우리의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우리 주님이 고난받은 것을 기억하는 고난 주간입니다. 감동적인 태양의 후예라고 해도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금식하고 tv금식하며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새벽기도회 나와 기도함으로 육신적인 질병이 치유받고 마음의 질병을 치유받으시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구리뱀을 바라보았을 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30대 의사가 생후 4개월 미숙아 딸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 끊었다는 기사가 났습다. 4개월 전 태어난 쌍둥이 딸 중 한 명이 미숙아로 태어난데 대해 비관해 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육신적 문제가 있습니까? 가족 가운데 육신적 문제로 고통받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신 우리 예수님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고쳐주시고 설령 평생 그 질병을 가지고 산다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육신적 문제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만들어 주어 그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모델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고난 주간 육신적인 문제를 뿌리체 치유받고 일어서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5,6)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 말씀합니다.

6절에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형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 형을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죄의 삯은 사망인데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완전히 죄의 삯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겠습니까?

무엇인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함을 줄 수 있겠습니까?

니체는 초인이 되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역시 초인이 되지 못하고 초라한 인생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신실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신앙으로 잘 성장했지만 무신론자들의 책과 무신론자 리츨의 애제자가 되면서 완전히 신앙에서 떠나 버렸습니다. 45세의 나이에 “격심한 두통과 눈의 통증, 계속되는 구토, 우울증 엄습, 매독 감염” 등으로 교수직 은퇴하였고 허무주의에 빠져 1882년 늦가을에 자살의도까지 품고 있었을 정도로 절망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의 고된 영혼과 육체는 1889년 1월 3일 투린의 길거리에 심하게 학대를 받고 있던 말을 바라보다가 쓰러졌고 예나의 정신 병원에서 어머니와 누이의 보호를 받다가 1900년 8월 25일 쉰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을 초월한 실존주의를 부르짖었던 세계적인 지성 사르트르도 폐부종으로 입원하여 한 달 가까이 지내는 동안 그는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며 미치광이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죽음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죽음의 문제를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죄의 인자인 도덕심, 윤리의식을 말살한다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스트레스나 노이로제같은 말을 사용한다고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인자를 발견하여 그 인자를 제거한다고 죽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사망 권세를 깨고 일어서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죽음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다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나라. " (마가복음 10 : 45)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문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찬송가-날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 어지 찬양 안할까”

아직까지 지난 죄 때문에 그 죄로 말미암아 죄의 노예로 살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습니다. 흘러간 바람은 다시 우리 앞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나온 모든 죄악들은 다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용서받고 새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

사탄은 우리를 계속 정죄합니다.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처형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사탄은 인간을 고발하고 정죄하기 위해 그 율법으로 무장하여 덤벼들고 있습니다. 참소하고 고발하고 고소합니다. 양심에 고소합니다. 사탄은 존재 이유는 사람을 시험하고, 유혹하고, 미혹하고, 정죄하는데 있습니다. 누가 정죄하면 “그래 너가 몰라서 그렇지 네가 나를 알면 훨씬 그보다 더 심하게 정죄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나는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었음을 믿는다.”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을 인생의 사명으로 사는 어떤 집사님이 있었답니다. 교회에 가면 목사님의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을 보고 목사님를 폄하하고 비판하고 정죄하였답니다. 교회개혁을 부르짖으며 장로님을 목사님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힘쓰고 애쓰며 그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교회에 다녔답니다. 그런데 이분이 죽어 천국에 갔답니다. 천국 입구에 엄청나게 많은 시계가 걸려 있고 그 시계 밑에는 사람들의 명패가 일일이 붙어 있었답니다. 베드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하는 말 "여기에 걸려있는 시계는 자신이 세상에서 살 때 나쁜 일을 한 만큼 시계 바늘이 빠르게 돌고 있느니라." 그 말을 들은 집사님은 통쾌하게 생각하고 자기가 비판했던 권사님 시계를 보았답니다. 빨리 돌고 있었답니다.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했답니다. 장로님 시계를 보니 더 빨리 돌고 있고, 목사님 시계를 보니 더 빨리 돌고 있었답니다. “위선자들 그러면 그렇지”라고 통쾌하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자기 시계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아한 마음으로 베드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답니다. "전 나쁜 일을 하나도 안해서 내 시계가 없나보죠?" 그러자 베드로가 "당신의 시계는 너무 빨리 돌고 있어서 모세 할아버지가 지금 선풍기로 쓰고 있소!"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정적인 인간 세계에 집중하지 말고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 43:25)"

이번 고난 주간에 지은 죄를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나와 회개하고 죽음과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3.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5).

5절 다시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마땅한 대가를 예수님이 받으심으로 우리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범죄하면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평화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바쳐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참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엡 2:14-19)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십자가가 있는 곳에 동서가 평화를 이룹니다. 십자가가 서는 곳에서는 남북이 하나가 됩니다. 지역감정의 담이 무너집니다. 빈부의 담, 남녀의 담, 권력의 담, 학력의 담, 민족의 담, 나라의 담이 무너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돌아가심으로 모든 담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서하며 화평한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도저히 용서해 줄 수 없는 부분도 용서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아직 부부가 묵은 감점으로 화해하지 못하고 각방 쓰신다면 이번 주에 십자가를 바라보고 합하시길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인가정에 심방을 갔답니다. 찬송과 기도, 설교가 있은 후, 목사님은 "저는 심방할 때마다 식구들이 모두 돌아가며 기도하게 합니다. 그래야, 그 사정을 알고, 함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설명한 다음, 먼저 초등4년생 아들에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한참 주저하다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우리 엄마와 아빠가 각방을 쓰지 않게 도와주세요. 엄마는 아빠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싫다고 하십니다. 아빠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라고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냅니다(고전13:7)”신문에 보니까 각방 쓰는 부부는 이혼율이 높다고 합니다. 건강치 못하다고 합니다. 인간의 체온은 36.5도 인데 1도만 높으면 질병이 잘 안걸린다고 합니다. 1도 낮을 때 암세포가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새벽 3시가 되면 1도쯤 내려간답니다. 그런데 부부가 함께 자면 서로 보완이 되어 온도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건강과 장수를 위해서도 용서하시고 합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교인들끼리 서운한 감정 풀어 버리시길 바랍니다. 원수같이 지내는 성도가 있으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해하시길 바랍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부모와 자식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신문에 보니 이미 해어진 여인을 잊지 못하고 찾아가 살해하는 내용이 종종 나옵니다.

딴 여자 왜 만나다고 맥주·우유에 농약 타 살해를 시도하고 결별을 요구한다고 격분하여 살해하고, 무시한다고 살해하고 참으로 사람 사귀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 다시면서도 정신적으로 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미워하는 것 자체가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묵은 감정 때문에 인사해도 얼굴 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어려운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섬겼던 교회에서는 한 집사님이 미워하는 집사님 뒤통수 보기 싫어 그 집사님 뒤에는 절대 앉지 않는다는 분도 보았습니다. 화해하지도 않고 교회를 떠나지도 않고 그 지옥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침뱉고 조롱하고 팬티를 빼앗고 때리고 희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자신을 부모를 죽인 원수까지고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우리를 평화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본받아 용서하고 용서받고 진정한 평화를 누리를 가정으로 교회로 삶으로 일어 서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친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사실인 양 믿고 친한 친구가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을 자신도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나안의 축복을 못누립니다. 가데스바냐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고 원망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가나안 땅을 가보았습니까? 아닙니다. 10명의 지도자, 정탐꾼의 말을 듣고 모세를 자신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원수로 생각한 것입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 원수도 용서해 주시기 위해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135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후렴>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2.멸시 천대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지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원수를 만들지 마십시오. 이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참된 평화를 누리십시오. 마음에 참된 평강을 누리십시오. 세상에 용서받지 않고 살만큼 의롭게 사는 사람들 없고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있는 사람 없습니다.

인간 끼리 원수를 맺고 앙금을 가지고 살 필요가 있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핍박하는 시어머니도 아무리 나의 가슴을 멍들게 한 사람들일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핍박을 한다 해도 원수로 생각하지 말세요. 용서하고 오히려 그들의 복받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개와 우리가 달리기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개보다 나은 놈입니다. 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개보다 못한 놈입니다. 비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입니까 개 같은 놈입니다.

서로 원수 맺고 살면 똑같은 사람 됩니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했습니까?

과연 예수님은 로마에 반역하는 반역 죄 때문에 돌아 가셨을까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죄 때문에 돌아가셨을까요?

예수님의 유다의 탐욕 때문에, 빌라도의 비겁 때문에 제사장들의 시기 때문에 돌아가셨을까요? 먼저 우리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질병과 슬픔을 대신 지시는 십자가입니다.(4,5)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문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5,6)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5)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받은 이유를 다시 한번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건강한 삶을 위해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하기 위해 우리의 평화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에 나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십시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6.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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