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십자가(2) 대신 지는 십자가(마가복음15:21-2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087 추천수:6 112.168.96.71
2016-03-13 15:03:23

 

십자가(2) 대신 지는 십자가

마가복음15:21-23

 

지난 주 친구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알파고가 바둑 명문고로 등극했답니다. 그러면 미모 관리 명문고는 어디이겠습니까? 미스고랍니다. 음식 상하지 않는 명문고는요? 냉장고랍니다. 찟어지면 수습을 잘 해주는 의학 명문고는요? 반창고라고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은 인공지능으로 통하는 세상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인공지능 가라사대”로 통하는 시대 말입니다. 요즈음 차 운전할 때 아무리 뛰어난 머리를 가졌어도 길 찾는데는 네비게션을 못 따라갑니다. 요즈음은 교통 상황까지 반영하여 시간까지도 거의 정확하더라고요. 이뿐 아니라 집을 사고 팔 때도 인공 지능에 물어 보고, 재판을 할 때도, 직장을 갈 때, 대학을 진학할 때, 질병이 걸렸을 때도, 결혼할 때도, 교회를 선택할 때도 인공지능에게 물어볼 시대가 도래할 것 같습니다. 이미 생명공학(BT), 정보기술(IT), 나노기술(NT)의 발달로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2011년 첫선을 보인 왓슨은 불과 5년 만에 최고 수준의 의사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뛰어난 진단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종양학회에 따르면 MD앤더슨 암센터 등 5개 유명 병원은 왓슨을 바탕으로 암 진단을 실시해 진단율 정확도 82.6%를 기록했답니다. 대장암은 98%, 직장암 96%, 췌장암 94%, 방광암 91%였고 자궁경부암은 100%였답니다. 인간 암 전문의의 초기 오진 비율은 20~44%에 이른답니다. 미국 UC샌프란시스코 등 5개 대학병원에서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탑재한 로봇이 35만건의 약 처방을 조제하면서 단 한 차례의 실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주식에서 헤지펀드에서도 인공지능이 인간 펀드매니저보다 더 높은 수익률이 높다고 합니다. 시장조사기관 HFR에 따르면 올해 1~2월 인간 펀드매니저들은 헤지펀드에서 평균 3%의 손실을 냈지만, 인공지능을 이용한 헤지펀드는 5%의 수익을 거뒀답니다. 돈을 벌고 싶다면 사람보다는 인공지능을 믿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2030년엔 인공지능이 '부장님'이 되고 인공지능이 최소 300만 명이 부하직원을 거느릴 것이라고 합니다. 컨설팅업체 딜로이트는 지난해 "영국 일자리의 35%가 20년 내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역시 향후 10~20년 안에 미국에서 702개의 직업 가운데 절반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더 나아가 '터미네이터' '이글 아이'처럼 인간이 만든 기계가 나올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기술분야에서는 싱귤러 포인트(singular point·특이점)가 왔다는 것입니다. 물은 100도씨에서 0.1도씨만 모자라도 끓지 않는데 0.1도씨가 더해지면 폭발하듯 끓어오릅니다. 이것을 싱귤러 포인트(singular point·특이점)라고 합니다. 이제 기계가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발명하기 때문에 최고의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면 인간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명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호들갑 떨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 역시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역사 이래 자기 지배력 확장을 위해 발명해 냈던 수많은 도구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태어나 먹고 자고 아이들 낳고 경쟁하다 죽는 것입니다. 문명의 변화에 따라 약간의 의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새로운 세대로 가면 인간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러면 사람의 의식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PANTS라는 영어 약자로 예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이며(personal), 흥미본위로 살며(amusement), 자연스러움을 좋아하고(natural), 성별구분이 모호하며(trans-border), 극단적 자기사랑(self-loving)으로 살기를 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래 인간 사회의 인간들의 특징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사랑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딤후 3:1-5에서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회가 될 것입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의 부담을 주고 자신의 편리를 제한하는 모든 것을 사람들을 배격할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가 그렇게 되어지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병든 부모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병든 자식 부담으로 생각합니다. 부담되면 결혼도 안하고 부담되면 아이도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담되면 사람도 마구 죽입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부담되는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십자가를 억울함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믿음의 사람으로 쓰임받는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오늘 나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어느날 부담되는 십자가를 만났습니다. 오늘 성경은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이 되어 아프리카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것입니다. 어느날 교회에서, 어느날 가정에서, 어느날 학교에서, 어느날 직장에서 부담드러운 일을 만난 것입니다.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아무런 연고는 사람입니다. 시골에서 와 지나가는데 로마 군인에게 붙들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한 것입니다.

이 때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억울하다는 생각입니다. 왜 내가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사형수 취급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왜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나 홀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을 사랑했던 스승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겠다고 나서지 않는데 자신은 예수의 “예”자도 모르는 사람인데 왜 내가 억울하게 지냐는 것입니다. 떡으로 배부름을 당한 사람도, 문둥병을 고침받은 사람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도, 갖가지 질병에서 고침받은 사람들도 십자가를 다 외면했는데 왜 내가 지느냐는 것입니다. 대학까지 혜택을 본 큰 아들도, 유산을 물려받은 큰 딸도 지지 않는데 왜 배우지도 못한 내가 부모의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왜 내가 부장이 되어야 하는데”라고 억울하다고 대신 지어야 할 십자가 내 팽개치면 그 회사에 오래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왜 나만 십자가를 억울하게 지어야 하냐고 십자가를 내 팽개치면 쓰임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억울해도 쓰임받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구레네 시몬은 아무런 항변을 하지 않고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갔습니다. 이유도 영문도 모르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인생에게 주어진 특별한 기회였습니다. 믿음으로 인생을 전환시키는 기회였습니다.

대신 지는 십자가, 억지로 지는 십자가를 통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변화되었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시몬을 소개할 때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아버지라고 소개하는 것은 당시 그 만큼 아들이 이름만 대도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다 알려진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루포에 대하여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롬16:13)"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는 것 뿐 아니라 "탁월할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 제직명단이 나옵니다.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 여기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바로 구레네 사람 시므온이라고 합니다. 니게르는 아프리카 니그로라는 뜻이고, 시므온은 히브리식 이름 시몬을 헬라식으로 표기한 시몬이라는 것입니다. 무명의 사람이 그는 대신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짐으로 예수를 믿어 안디옥 교회에서, 로마교회에서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이 장로님 간증을 들어 보았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치매에 걸렸답니다. 형제들이 있는데 형제들에게 어머님을 모실 것이냐고 물어 보았답니다. 다 모시지 않는다고 해서 "나에게 축복받을 기회, 쓰임받는 기회 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돌아가실 때까지 기쁨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골리앗이 쓰임받는 기회이고, 브닌나가 쓰임받는 기회입니다. 나아만이 쓰임 받는 기회이고, 바로가 쓰임받는 기회이며, 하만이 쓰임받는 기회입니다.

왜 나만 치매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냐고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믿음의 사람으로 쓰임받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이런 장애아를 주어 평생 고통스럽게 사느냐고 도피하는 부모가 되지 말고 믿음의 능력을 체험받는 기회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왜 이런 직장을 만나 혼자 야근까지 하고 월급도 적느냐고 떠나는 직원되지 말시고 기회로 활용하여 믿음으로 회사를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2)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 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후렴)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 다면 어떤 역경(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

 

2. 우리는 십자가를 불평으로 지지 말고 감사로 지고가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면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가면 불평과 원망을 했다는 기록을 성경은 남겨 놓고 있지 않습니다. 감사했다는 표현도 없지만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 나타난 결과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만남을 통해 나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십자가가 다가 올 수가 있습니다. 결혼하였는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습니다. 자식을 낳고 사는데 어느 날 자식이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결혼을 하였는데 어느 날 아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건강의 십자가, 경제의 십자가, 인간관계의 십자가가 어느 날 다가 올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나타나는 현상은 대부분 4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도피 형입니다. 둘째는 무관 형입니다. 셋째는 의무 형입니다. 넷째는 십자가 형입니다. 기대형입니다. 주어진 상황을 나의 십자가로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해쳐나가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급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성숙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로 기대하며 십자가를 지고 가면 어떤 결과가 벌어집니까?

두 아들이 초대교회 유명 인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안디옥 교회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어떤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16:1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기록된 시점으로부터 약 30년 전 십자가 행렬 현장에 있다가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신 시몬의 아내가 바울의 영적 어머니라고 언급할 정도로 초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했을 것이고 그 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가족에게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아프리카를 복음화 시키는 씨앗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이고 회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감사함으로 짊어지면 내가 발전하고 발전된 나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는 것은 누구도 좋아하는 일이 아닙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며 회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지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 발전이 이루어지고 발전되 자신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을 하나님이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따라 그대로 믿고 나아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민족을 구원하는 일 하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민족 구원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살인자로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라 민족의 해방자로 인생은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도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지만 억지로라도 대신 십자가를 질 때 그의 인생도 눈물의 선지라도 쓰임받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했습니다.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억지로다도 봉사하고, 억지로라도 섬기도, 찬양하고, 웃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그의 아내도 전도하였고, 그의 자식도 예수님을 믿게 하였고, 민족복음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 가문을 변화시키고 민족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가 자기 발전의 기회가 된 것이고 그는 시대적인 신앙의 인물이 되어 축복의 통로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광야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기록을 할 때는 수없이 불평과 원망을 하는 기록을 성경은 남겨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억지로 십자가를 지면 불평과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요즈음 새벽 기도시간에 신명기를 읽으며 묵상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은 불평과 원망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탈출시켜 주었는데 물이 없으면 물이 없다고,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다고 만나를 주면 왜 날마다 만나만 주냐고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심지어는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얼마나 됩니까? 재미있어 하는 일이 얼마나 됩니까? 매일 새롭고 신나는 일이 얼마나 됩니까? 지루하고 따분하고 하기 싫고 재미 없는 일도 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학생이 공부하기 싫다고, 환자가 고통 때문에 수술 받기 싫다고 불평과 원망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젊은이가 침묵으로 일관해야 하는 수도회에 들어갔답니다. 5년 뒤 수도원장이 그에게 다가가 일러주었답니다. "두 마디 말 정도는 해도 됩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침대가 딱딱합니다 Hard bed." 10년쯤 되던 해에도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두 마디 말 정도는 더 해도 됩니다." 그러자 수도사 왈, "음식이 차갑습니다 Cold food." 15년이 되던 해에 수도원장은 똑같이 일러주었고, 수도사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수도 생활을 그만두겠습니다 I quit." 그러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했답니다."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군요. 당신은 이곳에 들어온 후로 불평만 했어요."

우리가 광야같은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설 때 이런 말을 들으면 안됩니다. 끝까지 같이 가는 사람은 불평과 원망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과 원망만 한 사람들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늘 불평과 원망만 하면 부부도 같이 가지 못하고, 회사 직원도, 교인도 같이 가지 못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늘 아내의 밥차림에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하도 남편이 밥투정을 하니까 아내가 그러드라는 것입니다. “나도 30년 당신 설교 들었지만 그냥 듣고 있으니 아무 소리 말고 밥 잘 드세요”

왜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가야 하는 광야같은 인생을 통과하게 합니까?

신명기 8장에서는 명쾌하게 세가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첫째는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신8:2) 둘째는 믿음과 순종의 순련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신8:2). 셋째는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신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3. 우리는 십자가를 손해로 받아들이지 말고 상급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남을 대신하여 지는 십자가는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회피해 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를 죽이고 자식들이 부모를 버리는 이유가 바로 억지로 지어야 할 십자가가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지고 감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적극적으로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힘이 없어 묵묵히 로마의 권력 앞에 그 일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제도의 틀 속에서, 당시 최고 지배 권력인 로마의 권력 앞에 어쩔 수 없었으니까 부당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십자가를 지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에게 상급이 된 것입니다. 손해가 아니라 유익이 된 것입니다. 병든 부모 수발하는 것, 장애 자녀 돌보는 것 손해라고 생각하면 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하나님이 주신 상급의 수단으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아도 될텐데 왜 이런 말씀을 구태여 기록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 15: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를 처음 읽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엄청난 고난을 당할 때였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 때문에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형을 당하였습니다. 짐승의 밥이 되어야 했습니다. 자식들이 눈앞에서 화형당하는 처절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고통과 고난이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기록을 통해 억지로라도 대신 지는 십자가 손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들이 예수 믿어 유명인사가 되었고 가문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 지금은 손해인 것 같고 힘들지만 결코 손해가 아니라 상급이 된다는 것을 교훈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갔는데 너희들도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왕 중에 효자로 유명한 효종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민정시찰을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팔순 노모를 업고 길가에 서있었습니다. 효종이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왜 노모를 업고 있는가?” “저의 모친의 평생 소원이 임금님 용안을 뵙는건데 오늘 30리 길을 걸어와서 임금님 용안을 뵈니 소인의 마음의 큰 짐을 덜었습니다.” 이 효자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큰 상을 내렸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또 다른 한 사람도 그렇게 노모를 업고 왕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다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그도 똑같은 말을 했답니다. 그러자 그 동네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성토했습니다. ‘저 놈은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입니다. 지금 임금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효종은 효는 흉내 내는 것도 아름답다며 똑같은 상을 내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십자가도 그렇습니다. 흉내라도 내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이 시대 최대 위기는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겠다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대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생활고를 믿음으로 이겨나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주여, 너무나 힘듭니다! 주님, 너무 너무 힘들어요!"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작게 잘라 주셨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더 작게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눈앞에 젖과 굴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보이는데 요단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오던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놓으니까 그 십자가가 다리가 되어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십자가는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아서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기치 않게 십자가를 졌습니다. 전혀 준비도 되지 못했고, 또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던 십자가가 내 앞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좋아서 지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십자가가 지워졌다면 억지라도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손심이 상하고 체면이 깎여도, 불이익이 다가와도 묵묵히 감사함으로 기회로 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 10:38)"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재수 없이 붙잡혔네' ‘왜 하필이면 나인가?’할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사도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억지로라도 내 인생에 주어진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우리 인생에 복된 길이 열리게 됩니다. 억지로라도 내가 가정의 십자가를 지면 가정이 행복해 집니다. 억지로라도 내가 자녀의 십자가를 지게 되면 자녀들이 미래가 밝아집니다. 억지로라도 내가 교회의 십자가를 지게 되면 교회가 부흥하고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억지로라도 내가 민족의 십자가를 짊어지면 민족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모세가 십자가를 짊어지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포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룻이 가정의 십자가를 짊어지자 그 가정에서 다윗이 나오고 메시아가 탄생하였습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십자가를 짊어지자 민족이 구원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한 알의 밀알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3.13.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