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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1) 인간관계의 십자가(마태복음27:27-3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340 추천수:4 112.168.96.71
2016-03-06 14:59:03

 

십자가(1) 인간관계의 십자가

마태복음27:27-31

 

어떤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선단체 모임을 만들었답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2주에 한 번씩 봉사 모임을 가졌답니다. 자신이 회장이 되어 회원 30여명과 함께 독거노인과 장애노인, 치매노인을 위한 봉사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임원회를 하면서 회장과 부회장이 충돌이 생겼습니다. 회장은 이번에는 치매노인을 중심으로 봉사하자고 제안 했는데 부회장은 치매 노인은 너무 힘들고 자신들의 형편에 버거우니까 독거노인을 중심으로 봉사활동을 하자고 제안을 했답니다. 결국 표결에 붙였는데 독거노인을 중심으로 봉사활동을 펼치기로 가결하였답니다. 회장인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은 권사님은 마음이 불편했답니다. 3년 동안이나 회장으로 봉사했는데 회원들이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몰라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권사님이 화장실에 있는데 부회장과 회원 몇 명이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자신에 대하여 "독선적이고, 지도력이 부족하고, 돈에 대하여 불분명하다"고 부회장이 자신을 비난했답니다. 집에 가서 생각했답니다. 자신이 그렇게 잘못된 사람인가? 그는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할 만큼 했고, 돈에 있어서는 정말로 깨끗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였답니다. 해명하고 싶었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명하면 자신만 치졸한 인간이 될 것 같았답니다. 그래서 조용히 교회를 떠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종종 교회에서 좋은 일을 열심히 하다가 인간관계 때문에 교회를 멀리하고 신앙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나쁜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한 일도 아닙니다. 선한일, 주님을 위한 일을 하다 충돌이 일어납니다. 주일 성도님들을 위해 식사 봉사하다 사소한 일로 충돌이 생겨 교회를 멀리하고 떠납니다. 설거지 하러 갔는데 설거지 통에 누군가 닦지 않은 그릇을 놓아두면 화가 납니다. 바자회하는데 누가 간섭하면 불쾌합니다. 청소하는데 같은 당번이 나오지 않으면 신경질이 납니다. 커틴을 해 놓았는데 어떤 분이 “색이 뭐 그러냐”고 핀잔을 하면 다시는 교회일 안해야 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목자로 섬기다, 구역장으로 봉사하다, 성가대로 봉사하다, 교사로 섬기다, 설교를 듣다가, 성경공부를 하다가 인간관계의 충돌과 갈등으로 인하여 시험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갈등과 충돌은 대부분 세 가지 원인에서 생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욕구 충돌, 둘째는 가치관의 차이에 의한 충돌, 셋째는 감정의 충돌입니다. 욕구 충돌은 실제적인 이익과 관계된 충돌입니다.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충돌입니다. 삶의 방법과 관계가 있습니다. 봉사하러 가는데 독거노인으로 가냐 치매노인으로 할 가냐 라는 문제는 가치관 문제입니다. 감정충돌은 느낌과 관계있습니다. 화장실에서 기분 나쁜 소리를 들은 것은 감정충돌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아예 교회를 떠난 탕자형이 될 수 있고 간간히 교회에 나오는 유랑형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나안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기는 나오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포로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인으로서 사명의식나 책임감도 없고 성도의 교제의 기쁨이나 신앙생활의 행복도 잃어버리고 형식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행복하게 하고 한 평생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이루어 드리려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시험의 벽을 잘 넘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피값으로 산 우리가 영적인 한 형제, 영적 가족으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지체의식에 의한 풍성한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 생활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부족합니다. 맘에 안 맞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다툴 때도 있습니다. 헌금 생활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정상 교회에 자주 출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일하다 안 좋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 언짢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도 때로는 자신이 싫은데 어찌 좋은 소리만 듣고 살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신도 내가 낳은 자식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남이 어떻게 내 마음에 맞는 말과 행동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문제로 서로 마음 상하며 신앙생활을 멀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다 좋은 옷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다 환영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게 좋은 소리만 듣고 살겠습니까?

 

이런 문제의 답은 인간관계의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통해 인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어떤 인간관계의 시험도 넉넉히 이기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도 모든 인간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존경과 칭찬을 받지 못했습니다. 인간 구원사를 성취하면서 인간관계를 통해 수없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고 좋은 일을 하시면서도 늘 오해당하고 비난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상처 때문에 인류 구원 사역을 포기하거나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분노하며 제자들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에게 부당하고 억울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에게 조롱받았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너희들 끼리 잘 해먹으라고 분노하며 십자가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어야 십자가에는 인간관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존심 상하게 하는 목사님, 마음에 들지 않는 장로님,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교인, 부담스러운 시부모님, 날마다 오락실에 가서 사는 자녀들, 병든 가족, 술 중독이 된 가족, 장애를 가진 가족, 나를 조롱하는 사람들 등도 그 십자가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신앙인이라면 인간관계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인간관계의 십자가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읽은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당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예비적 형벌을 통하여 몇 가지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크고 작은 인간관계의 십자가를 어떻게 져야 할까요?

1.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부당한 대우보다 사명을 핵심 목표로 붙들어야 합니다(26).

예수님은 부당하게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 의해 육체적 학대를 당하였습니다. 폭력(26)에 의해 가혹행위를 당하였습니다.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당한 십자가 처형을 위한 예비적인 첫 번째 형벌은 잔인한 채찍질이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잔인했습니다. 채찍은 회초리가 아니었습니다. 가죽으로 되어 있는데 긴 가죽채찍 끝에는 날카로운 뼈나 납덩어리가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채찍질당하는 사람은 옷을 벗게 합니다. 손은 뒤로 결박당한 채 등을 구부려서 채찍질당하기 좋은 자세로 기둥에 묶입니다. 그리고 힘껏 채찍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수의 등은 바둑판처럼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게 됩니다. 어떤 이는 이런 채찍을 맞게 되면 기절하거나 거의 미쳐버리는 상태까지 가게 된다고 합니다. 부당한 권력과 그 하수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폭력적 형벌을 받았습니다. 반 인권적 대우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상대에게 이 정도가 아니라 조금만 손해를 당해도 힘이 있으면 힘으로 제압하고 힘이 없으면 억울하여 사명을 포기해 버립니다. 부당한 대우를 못 견디어 합니다. 서비스 센타에 가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 자리, 며느리의 자리, 남편의 자리, 아내의 자리, 목사의 자리, 교인의 자리, 구역장의 자리, 성가대의 자리, 교사의 자리를 포기해 버립니다. 시험에 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채찍을 맞으면서, 자존심 상한 현장에서도 십자가의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힘이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억울해 하지 않고, 대항하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의 과정을 다 감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고난을 당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당할 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16:21)”

이 사실은 이미 예수님 오시기 7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사53:5-8)”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인간관계의 어떤 충돌이나 갈등, 시험도 극복해야 합니다.

자주 만나도 가까이 있다 보면 욕구차이에 의한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통계를 보니까 우리나라 부부들은 1년에 평균 48번 부부싸움을 하고 산다고 합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직장인들은 동료나 상사 후배들과 의견 충돌 1주일 평균 1.34회 있다고 합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견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고, 욕구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대부분 사람들은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합니다. 첫째 방법은 힘으로 대결하는 것입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전되면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회피하는 것입니다. 피해버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방법은 서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요즈음 말하는 상생의 정치, 윈윈 전략, 무패의 원리입니다. 충돌이 생겼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타협하여 해결점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정치와 우리들의 삶을 보면 이것이 부족한 것입니다. 근대 정치가 시작된 영국에서 정치의 3요소를 첫째는 화해(Composition)이고 둘째는 상식(Comonsence), 셋째는 타협(Compromise)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첫째 다수의 비논리적 지배의식, 둘째 사실왜곡의 기술, 셋째 선동적 연막이 특징처럼 보입니다.

협상학자들은 협상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 3요소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가 잘 설정된 목표치입니다. 둘째 요소는 협상을 원만히 이끌만한 파워 즉 영향력,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협상 기술이 뛰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목표치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이 협상이 목표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왜 결혼했고, 왜 목사가 되었고, 왜 사장이 되었고, 왜 구역장으로, 목자로 봉사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을 물고 늘어지면 안 됩니다. 사명을 보지 않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을 보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사탄은 늘 두 가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핍박입니다. 우는 사자처럼 두루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핍박을 통해 사명을 이루지 못하도록 합니다. 두 번째는 유혹입니다. 광명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내부적인 분열을 꾀하는 것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이 바로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자존심이 상하고 모욕을 받는다고 해도 목표하는 것을 이루면 되는 것입니다.

하버드대 교수이며 하버드대 <협상 문제 연구소>부소장으로 있는 윌리엄 유리 교수는 [ NO를 극복하는 협상법]에서 협상의 테크닉 몇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가지를 살펴보면 [대응하지 마라/ 논쟁하지마라/ 거절하지 마라/ 밀어 붙이지마라/ 맞불을 놓지마라 ] 등입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협상에 있어서는 목표를 보고 목표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Roser Fisher 외 2인이 쓴 "Yes를 이끌어내는 협상법"에서도 첫 번째가 [사람과 문제를 분리시켜라]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십자가를 지고 마침내 주어진 사명을 다 이루어 승리하려면 항상 사명을 붙들고 인간관계를 해야 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백성들과 얼마나 충돌합니까? 자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자신을 원망합니다. 누이와 형이 비난합니다. 사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모두가 그를 지원하고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귀족들이 오히려 반대합니다. 힘있는 사람이 지지해주지 않습니다. 반대자들이 왕에게 진정하고 분열을 일으켜 방해합니다. 그들과 싸운 것이 아닙니다. 성벽 재건의 사명을 붙드는 것입니다. 한나가 브닌나를 원수로 생각하고 그녀와 싸움만 했다면 사무엘을 낳아 민족 지도자로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괴롭히는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고 사명을 잃어버렸다면 그는 성군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십자가에서 승리하려면 어떤 경우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목사로서 사명, 장로로서의 사명, 권사로서의 사명, 집사로서의 사명, 목자로서의 사명, 구역장으로서의 사명, 교사로서의 사명, 부장으로서의 사명, 성가대원으로서의 사명, 아버지로서의 사명, 어머니로서의 사명, 사장으로, 부장으로, 과장으로서의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문제의 사람보다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29).

예수님은 로마의 권력자와 하수인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학대를 당하였습니다.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희롱을 당하였습니다.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조롱하였다. 말하기를 안녕하십니까? 유대인들의 왕이여”라고 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총독의 관정에서 300-600명 된 군인들이 죄수인 예수님을 놀이삼아 마음껏 놀리고 조롱하려고 모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습니다. 홍포는 당시 예복으로 왕이나 지도자가 입었던 옷입니다. 왕을 상징하는 옷을 입히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디베료 가이사가 빛나는 못들이 달린 면류관을 썼는데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가시나무 관을 씌웠습니다. 황제의 오른손에는 통치권의 상징인 황제의 홀이 주어져 있었는데 로마 군병들은 그것을 모방하여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군주인 가이사에게 경배하듯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이사 만세’라고 외치는 대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모욕적인 말로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다. 강도도, 서기관과 제사장도 희롱합니다.(39,41,44)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지나가는 사람도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자존심을 뭉개고, 인격을 땅에 처박고, 자존심을 오물통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무능력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권세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들의 이런 모독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지속적으로 이런 모독과 조롱을 당하면 정신 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정신적 학대를 어떻게 처리합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문제를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극한 고통을 당하며 조롱받을 때도 조롱하는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죄를 보며 용서의 기도를 드린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제물이 되어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면서 죄 용서를 간구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예수님 옆에 달린 죄수가 변했고 예수님의 처형을 지휘했던 로마의 백부장이 변했습니다. 그는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39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의 문제 용서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죄인들과 싸우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대접받고 대가를 받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존경받고 인정받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승리하는 비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려면 문제의 사람을 보지 말고 그 문제를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충돌하면 그 사람을 원수 시 하지 말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아들이 오락실만 가고 공부하지 않으면 아들을 원수시하지 말고 오락실에 가는 그 아들의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내가 그 십자가를 지어야 하겠다고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원수까지 용서해 주고 사랑하는 마음이 인간관계를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문제가 해결됩니다.

소록도 두수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 온 외국인 수녀 2명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떠났답니다. 성당에 다시는 분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일손을 놓고 성당에서 열흘 넘게 두 수녀님을 위한 기도를 드렸답니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 그리고 마가레트(70) 수녀가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떠났답니다. 그들은 1959년과 1962년에 소록도에 와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돌보와 주었다고 합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알고 국민포장,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답니다. 이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답니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란 편지 한 장만 남겼답니다. 편지에서“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했답니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쓰여 있었답니다. 온갖 사랑을 베풀면서도 한 번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부 훈장도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주었다고 합니다.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답니다.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봐 조용히 떠났답니다. 이 수녀님들이 말도 통하지 않고 풍습도 다르고 특히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사람을 보고 사역했다면 아마 실패했을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의 사랑으로 봉사하여 승리한 것입니다. 문제의 사람만 보면 어떤 인간관계도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관계의 십자가 문제의 사람을 보지 말고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드는데 쓰임받은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분노를 표출하지 말고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30).

예수님은 감정적인 학대를 당하였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왕에 대한 충성의 표로 입맞추는 대신에 가장 모욕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왕을 위해 목숨바쳐 싸우는 대신 갈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며리를 쳤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은 더욱 머리 깊이 박혔을 것이고 피는 더욱 흘러 내렸을 것입니다.

침을 뱉는 행위는 상대를 극토록 모욕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때리는 행위 역시 치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감정을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은 감정을 표출하지 않으시고 참으셨습니다. 얼마든지 그들을 다 징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구원 사역을 다 이룰 때까지 모든 수모와 모멸감을 끝까지 참고 참았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히브리서 12장 2에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잡으로 온 말고의 귀를 베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이것까지 참으라(눅 22:51)”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버럭 화를 내고, 고함을 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뼈져리게 체험한 베드로가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감정이 충돌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버드대학의 로저 핏셔 교수가 발표한 「하버드식 협상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협상이나 교섭에 성공하기 위한 몇가지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원리를 몇가지 살펴 보면 첫째 「서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문제는 되도록 피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인간적 감정문제는 떼어놓고 회의를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서로가 득을 볼 수 있는 문제를 우선해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누가 이겼다 졌다, 누가 더 득을 봤다 못봤다 하는 것을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정을 건드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요셉은 얼마나 억울함을 많이 당했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참았습니다. 인내해야 관계 파괴의 산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의 문제, 직장 동료와의 다툼, 배우자와의 불화, 아이들과의 불만 등 거의 모든 종류의 화근이 인내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내 없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는 쉽지 않습니다. 인내의 힘은 참음과 견딤에 있습니다. 인내에서 참을 인(忍) 자는 칼날 인(刃) 자와 마음 심(心) 자가 합해서 된 글자입니다. 즉 마음 안에 칼날을 안고 살면서, 참고 또 참고 끝없이 참는다는 뜻입니다. 견딜 내(耐) 자는 말 이을 이(而) 자와 마디 촌(寸) 자가 합해진 글자로, 견디고 또 견디고 한없이 견딘다는 뜻입니다. 온갖 수모를 참고 수많은 시련을 견디는 것입니다. 인생 상처의 고통을 견디어 내는 적극적인 인내의 힘이 진주와 같은 아름다움을 낳습니다. 영롱한 진주도 처음에는 하나의 상처였으나, 오래도록 상처를 보듬고 인내할 때 아름다운 보석으로 태어납니다. 극동지역 사람들은 중국산 대나무(Chinese Bamboo)를 심는다고 합니다. 나무를 심고 나서, 물과 거름을 주지만 4년 동안 이 대나무는 거의 혹은 전혀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5년째 되는 해에 놀랍게도 나무는 5주일 동안 높이가 90피트나 자란다고 합니다. 성급함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자굴 속에서 혹독한 시련을 당한 다니엘도, 군중들의 돌에 맞은 예례미야도, 므낫세의 박해를 당하여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였다는 이사야도, 헤롯의 칼날 앞에 목을 내밀어야 했던 세례 요한도 인내의 힘으로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요셉은 끝까지 참았습니다. 다윗도 사울로 인해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았습니다. 모세도 자신이 돕고자 하는 백성들에게 수없이 감정적인 상처를 받았지만 참고 참았습니다. 마지막 감정을 참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 쳤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인간관계의 십자가를 매고 승리하려면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사명을 이룰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십자가 참 무겁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을 짊어지고 승리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짊어지고 사명을 완수하려면

1.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부당한 대우보다 사명을 핵심 목표로 붙들어야 합니다(26).

2.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문제의 사람보다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29).

3.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분노를 표출하지 말고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30).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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