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마을 열린이야기

열린이야기

게시글 검색
추억 만들기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1346 추천수:21 112.168.96.71
2014-11-26 11:49:42
추억 만들기
- 이 강근 집사 -

나에게는 아름답고 아련한 추억들이 별로 없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를 일찍 잃은 아픈 기억에다 이듬해엔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학창 시절은 건방기가 도져 학교 과정을 무시한 채 월반과 휴학을 반복하면서 벼락공부를 즐겼기 때문에 동창이라 해도 선배가 됐다, 후배가 됐다 헷갈렸으니 아름다움 추억을 만들 처지가 못되었다. 사회생활은 직업군인으로서 야전지역을 누비며 스무 번이 넘는 이사덕택에 슬하 5남매의 출생지가 제 각각 일 만큼 떠돌이 생활을 했으니 아련한 추억같은 게 남을 이가 없다. 내 머리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추억이란게, 어린 나를 한학(漢學)을 가르치시며 내 인생에 기초를 다듬어주신 생모님에 대한 생각과 6.25 피난 시절 눈 내리는 겨울밤 들려오는 어느 교회의 경건한 종소리에 대한 여운이 머리에 아스라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나는 오랜 군생활로 인해 살아가는 방식이 무척 단조로웠고 자녀들과 손잡고 소풍한번 변변히 다녀본 기억이 없을 정도이다. 세월이 지나 가정에 눈을 뜨고 가족을 더욱 사랑하게 된 것은 아마도 손주들이 태어난 뒤부터인 것 같다. 올 여름 아들.딸 내외가 휴가를 함께 할 것을 제안했을 때 그들에게 짐이 될 것을 알면서도 선뜻 응한 것도 귀여운 손주들과 몇 일 함께 하며 좋은 추억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함 때문이었다. 둘째 손주 정욱이 녀석이 서너 살 때였다. 아내의 지병이 유전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가족 모두 피를 뽑아 검사를 하는 과정에 정욱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이 귀여운 녀석에게 도저히 주사 바늘을 꽂게 할 수가 없어서 제 아빠와 함께 망설이고 있는데 제 엄마가 나타나 선뜻 애를 안고 의사에게 성큼 성큼 다가가 피를 뽑는 것이었다. 작은 행동일지 모르지만 순간 나는 그 기특한 모습에 내 딸들도 저런 자세로 시부모를 돌보아 주어야 할텐데 하면서 이 모습이 오래도록 좋은 추억으로 남기를 바랬다. 이 대견한 며느리에게 나는 가끔 “너 어머니로부터 점수 따는 것 하나 일러줄까?” 하고는 내 아내의 기호를 두어 번 귀띔해주며 웃는 것으로 보답했다. 휴가의 마지막날 밤 대천 해수욕장 해변을 산책하면서 그 때의 둘째 녀석이 자라서 제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첫째는 앞에서 할머니 손을 잡고 이끄는 모습을 보고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만들어지고 있구나!‘하고 느껴졌다. 아름다운 추억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어도 된다. 내가 만일 이 세상을 마감하는 순간에 시골 교회의 은은한 종소리를 귀로 들으며 바닷가에서 아내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두 손자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눈을 감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평온할 까 생각해보면서 이 소중한 추억들을 오래 오래 간직하리라 마음먹어본다.


지워지지 않는 낙서

지난 봄, 우리 가족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우물이 있고 풋대추가 대롱대롱 달려 있는 대추나무가 서 있는 그런 집으로 말입니다. 셋방을 전전하던 끝에 처음으로 장만한 내 집이라서 우리집 식구들은 모두 들떠 있었습니다. 말썽꾸러기 아들 딸 때문에 언제나 주인 아주머니의 잔소리를 귀에 달고 살아야 했던 엄마가 누구보다도 좋아했습니다. 이삿짐을 풀자 마자 내게 주어진 일은 담장 가득한 낙서를 지우는 일이었습니다. 서툰 글씨, 어딘지 모를 주소, 약도... 나는 깊고 아득한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려 낙서를 말끔히 지웠습니다. "아, 다 지웠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비비고 나와 보니 내가 애써 지운 글씨들이 모두

되살아나 있었던 것입니다. "어? 이상하다. 도깨비가 왔다 갔나? 아니면 달빛에 글씨가 살아나는 요술담인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나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다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려 낙서를 다 지우고 엄마한테 검사까지 받았습니다. "깨끗하게 잘 지웠네... 우리 착한 딸." 엄마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일어났습니다. 누군가 어제와 똑같은 낙서를 가득 해 놓은 것입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나는 낙서를 지우면서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혼을 내 주리라 마음먹고 저녁 내내 망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두 소년의 그림자가 담장에 어른거렸습니다. 범인이 분명하였습니다. "형!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이거보고 이사간 집 찾아올 거라도 그랬지?" "물론이지, 아빠는 집배원이었으니까 금방 찾아오실 거야." 형제는 하늘 나라로 간 아버지가 이사간 집을 찾아오지 못할까 봐 담장 가득 약도를 그리고 또 그렸던 것입니다. 나는 그날 이후 낙서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우리집 담장엔 그 삐뚤빼뚤한 낙서가 선명하게 살아 있습니다.

-TV 동화 행복한 세상 중에서-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