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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환자 할아버지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3246 추천수:24 112.168.96.71
2014-11-26 10:18:40
미리 예고했던 나환자 촌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환자 중의 최고령자인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꽃샘바람이 아주 맵게 옷소매 안을 감돌아 가슴 속 깊이까지 찬물을 끼얹듯하던 날이었지요. 사실 나환자 촌을 방문하기 전 머리는 바람에 엉클어지고 얼굴은 찬 바람에 퍼렇게 얼어 찡그린 표정으로 어떻게 내가, 영혼 육신이 함께 병들어 있을 나환자 할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내심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필시 그들의 마음은 고뇌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내 머리를 압도했었다고 고백해야만 옳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다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나환자 할아버지의 얼굴엔 내가 감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기쁨과 행복의 표정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었으며, 열 손가락이 하나도 없는 두 개의 몽당손을나란히 포개어 머리를 살포시 숙여 방문객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에는, 어느 한 구석 처연한 내색이나 열등감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웃으며 먼저 "이 선생님, 왜 안색이 나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엉겁결에 "할아버지가 너무 가엾어서 그럽니다." 라고 허덕이듯 대답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 "내가 가엾어서 안색이 편치 못하시다구요? 그렇다면 대답해 보십시오. 이 선생이 대학교수이며 문학박사가 되어 사회적 지도자로 일하게 된 축복의 삶이 도대체 어찌하여 가능했던 것일까요?"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하고 부끄러워서 무심히 그분의 눈을 마주 대하고 단정히 앉아 있었을 뿐, 유치한 몇 마디 언어로 대답을 시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대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질문에답할 만큼 심오한 지혜와 삶의 철학이 내게는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해야만 정직한 고백이 되겠습니다. 그때 그 나환자 할아버지의 연이어 나온 말씀이 진실로 내 가슴을 예리한 양심의 칼끝으로 찔렀습니다. "당신이 비록 대학교수이며 문학박사라고 할지라도 당신이야말로 참으로 가엾은 사람이며 또 무식한 사람입니다. 내가 왜 나환자가 되었고 당신이 왜 건강한 대학교수가 되었는지를 당신은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 "반대로 나는 손발이 모두 토막 나간 나환자이지만 당신보다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왜 대학교수가 되었고 내가 왜 나환자가 되었는지를 나는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 "나는 당신에게 내 교수직과 박사학위를 양보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평생 짊어졌어야 할 나병과 수고와 고통을 내가 대신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온 겨레와 온 인류가 우리들 생명의 창조주 하나님 앞에 항상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염원하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늘 기쁘고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그 나환자 할아버지를 만난 이후 내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환자뿐 아니라 결핵 환자, 각종의 암환자‥‥ 뇌성마비, 시각장애인. 그들 삶의 구석구석 현장 속에, 나 자신이 그들로 환치되어 들어가 앉기도 해야 하는 이유를, 그 나환자 할아버지가 분명히 나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인복/낮은 울타리 2005년 2월 호 중에서-


풀잎으로 닦은 길

아버지는 여러 해를 물방울처럼 부풀어오르는 붉은 습진으로 고생하셨습니다. 병원에 가자는 엄마의 성화에도 아버지는 괜한 호들갑이라며 한 귀로 흘리셨고, 심지어 치료가 어려워 발을 절단해야 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의사의 충고도 그저 무심히 넘기셨습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의 발은 부스럼과 짓무름으로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신발을 아예 벗어던지고 비탈이 험하고 숲이 무성해 길도 없는 산길을 맨발로 나가는 날이 잦았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한 엄마는 매일같이 툴툴거리셨습니다. 나는 모처럼 산비탈 밭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께 새참을 갖다 드리러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대문 앞에서부터 울퉁불퉁 밭이랑을 따라 마른 풀잎이 곱디 고운 융단처럼 길게 깔려 있었습니다. 나는 놀랍고 의아해 그 풀잎 길을 따라 쭈욱 걸어보았습니다. 그 풀잎 길 끝 산비탈 밭에서는 아버지, 엄마, 할머니가 나란히 돌을 골라내고 계셨습니다. "엄마! 누가 길에다 풀을 저렇게 깔았대요?" "으응, 할머니가 느이 아부지 신발 없이 다닌다고." 풀잎으로 낸 오솔길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여기저기 터지고 헤진 아들의 발이 안쓰러워, 새벽부터 나와 이슬까지 털어가며 풀을 베어 길을 내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쓰라린 발을 쓰다듬어주는 풀잎으로 닦은 그 길은 한평생 자식을 위해 살아오신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TV 동화 행복한 세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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