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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람의 미학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721 추천수:17 112.168.96.71
2014-11-26 09:39:04
모자람의 미학 / 정문술 (전 미래산업 대표)

11월의 바람이 온몸에 서늘하게 전해왔다. 도토리 나무 밑에 가득 쌓여 있는 낙엽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 소리를 냈다. 낙엽 밟는 소리가 낭만적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아침부터 소주를 마시고 산에 오른 내게는 서글프다 못해 서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무언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라 숨쉬기 힘들만큼 답답했다. 그러나 무기력한 내 눈에는 그저 눈물만 앞을 가렸다. ‘그래 죽어야지.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이 아니겠는가…’ 주머니 속의 수면제가 한 알 두 알 손에 들어왔다. 내가 진 빚 18억 원. 젖 먹은 힘을 다해 돈을 빌렸다. 하지만 기술 개발에 실패한 현 상황에서 그 돈을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연쇄 파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여보, 저도 당신 뜻을 따를게요.” 몇 달 사이 수척해진 아내는 어젯밤 비장한 결심을 했다. 나를 따라 죽겠다는 것이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도 죽음의 동의를 받았다고 했다. 깊은 한숨만이 절로 터져 나왔다. 나는 한 때 잘 나가던 중앙정보부의 핵심 과장이었다. 18년 동안 젊은 나날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던 지난 80년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나는 마흔셋의 나이에 강제 해직을 당했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을 싸 들고 작은 금형 공장 풍전기공을 시작했으나 순식간에 2천 만원을 날리고, 1983년 부천에 있는 작은 공장 하나를 전세로 얻어 총 직원 여섯 명을 두고 미래산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그 일에 매달렸고 연구 개발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반도체 제조장비 중에서도 최첨단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웨이퍼 검사 장비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몇 년 동안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18억 원 빚, 커다란 벽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청계산 정상에서는 강남 일대가 시원스레 보였다. 비정한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어째서 나만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지 억울하기도 했다. 그때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둘째 딸에게 이끌려 교회에서 가서 들은 설교 내용이었다. 그날의 주제는‘욥의 고난’이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그를 지금보다 더욱 순수하게 단련시키기 위한 은사였다.”‘그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어서 이런 시련을 겪는 것인지도 몰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음 한쪽에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희망이 솟아났다. 내가 죽으면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은 뭐가 되는가. 실패는 했지만 기술은 남아 있다.’ 4년 동안 18억 원을 쏟아 가며 축적한 기술을 이대로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웨이퍼 검사장비 보다 한 단계 낮은 제품을 개발해서 팔 수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도 있지 않을까.’나는 산 아래를 향해서 힘껏 약병을 던져 버렸다. 서둘러 차를 몰아 사무실로 달려갔다.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직원들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각오를 새롭게 한 나는 그동안 축적했던 기술력보다 한 단계 낮은 제품을 선정하여 핸들러 개발에 들어갔다. 반도체 제조공정에 꼭 필요한 장비면서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제품이었다. 우리는 당시 과학기술부에서 출연한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의 벤처기업 1호로 선정되어 투자를 받게 되었다. 7억을 지원 받아 그때까지 목을 죄어오던 18억 원의 일부를 갚았다. CEO는 언제나 위기를 맞고 그때마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는 그런 결정의 순간마다 성경속에서 지혜를 찾았다. 내가 처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을 찾아 그 뜻을 알 때까지 100번이고 읽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래서 내린 용단이 바로 1월 4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은퇴 선언이다. “전 이제 회사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납니다. 여러분은 미래산업을 착한 기업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나는 그 날부터 회사의 모든 일에서 손을 뗐다. 사실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결정이었는지 모른다. 미래산업은 내가 피땀 흘려 이룩한 회사고, 나는 아직 건강하다. 하지만 욕심이 더 커지기 전에 회사를 직원들에게 물려주겠다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권력이자 마약과 같은 속성을 지닌 경영권을 전문 경영인에게 물려주는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나의 바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자람의 미학’을 지키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위가 좋지 않아서 먹고 싶은 양의 80퍼센트만 먹어야 하지만 늘 그렇게 하지 못한다. 병원에 가는 한이 있어도 과식을 하고 만다. 더 할 수 있지만 모자라게 하는 것도 지혜다. 그래서 경영자로서 인생을 조금 모자라게 끝을 맺었다. 그리고 사재를 털어 한국과학기술원에 300억 원을 기부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인생만은 모자라지 않게 마감하고 싶다. 은퇴 후 빈자리를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 넓고 큰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 가이드 포스트 중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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