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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대체 뭐라고 한거야?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1065 추천수:16 112.168.96.71
2014-11-25 16:28:07
엄마 짝꿍이 자꾸 괴롭혀. 잉잉잉~"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딸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이성적으로 '왜 괴롭히는데?'하고 물어야 하지만 딸아이의 얼굴을 보니 화가 덜컥 난다. 그러해도 우는 딸아이에게 화난 표정을 보여줄 수 없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설거지하는 척만 해야 했다. "애들은 다 서울에서 왔다고 놀리고, 내 물건 뺏고 그래. 학교 다니기 싫어" 급기야 딸아이는 바닥에 앉아 엉엉 울어버린다.

딸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려는데 문득 삼십 년 전 일이 생각났다. 그때 나도 지금의 딸아이처럼 열 살이었고, 아버지의 전근 때문에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를 했다. "니는 말씨가 우리랑 다르네."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단연 이상한 아이 취급이었다."생긴 것도 희멀건 하니 이상하네." 전학 온 날부터 나는 놀림의 대상이었다. 내 한 마디에도 아이들은 웃어댔고, 날마다 '서울깍쟁이, 서울깍쟁이~'하고 이상한 노래만 불러댔다.

그러잖아도 전학 온 것도 서러운데 애들이 놀리기까지 하니 점점 학교가 싫어지고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우는 날이 늘었다. "학교 안 갈 거야. 애들이 나 싫어해. 안 갈거야. 잉잉잉." 그때 내 모습이 꼭 지금의 딸아이와 닮아있는게 아닐까. 어린 나이에도 아이들의 말투는 꽤 스트레스였는지 혼자 앉아서 아이들이 하는 사투리를 연습해보곤 했다. "이 문디 가시나야." "괘안타" 내 노력이 가상한 탓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아이들은 나에게 잘해주었다.

나도 점점 학교에 가기 싫다고 말하는 날이 줄었지만 문제는 내 짝꿍이었다. 얼굴도 시커머니 못생겨가지고, 아직도 구구단도 못 외우는 주제(?)에 나를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사는 것 같았다. " 니 이거 넘어오면 다 내 꺼다."책상에 삼팔선을 그어 놓고 살짝 넘어간 연필을 가져가 버리던 날, 나는 펑펑 울어야 했다. 그 연필은 아빠가 외국 나갔다 오시면서 사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필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내가 고무줄이라도 하면, "서울깍쟁이, 디게 못 하믄서 왜 맨날 하노." 하면서 고무줄을 다 끊었고, 치마 입고 온 날이면 "아이스케키~"하면서 어라, 오늘은 꽃팬티네." 하고 웃어대곤 했다.

악마가 따로 없었다. "엄마, 나 짝꿍 바꿔달라고 선생님께 이야기할거야. 도저히 같이 못 앉겠어." 처음 몇 번은 잘 참았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짝꿍의 횡포에 나는 드디어 붕기(?)를 결심했다. 아이스케키 사건이 발단이었다. '엄마가 내일 학교 가서 잘 이야기할 테니 기다려." 엄마의 말이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기다려라 이놈. 이제 우리 엄마한테 넌 혼났어.' 다음날 학교에 가는데 왜 그렇게 행복하던지. 노래가 절로 나왔다. "서울깍쟁이가 왜 이래 기분이 좋노. 아이스케키." 작꿍이 다시 한번 나를 괴롭혔지만 나는 입술만 구욱 깨물었다. "두고 보라. 우리 엄마 온다." 드디어 쉬는 시간에 정말 엄마가 왔다.

그런데 엄마는 선생님께 가시지 않고 복도에서 기웃거리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내 짝꿍의 팔을 잡았다. "올커니, 짝꿍을 혼내주려는 거구나. 잘 됐다. 너도 한번 혼나봐라." 나는 엄마를 응원하면서 이제 벌어질 일을 기대했다. 그런데 엄마는 짝꿍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는 게 아닌가? 몽둥이로 대려도 시원찮을 판에 웬 귓속말. 더 이상한 건 그 귓속말을 들은 짝꿍의 얼굴이 빨개진 것이었다. 저런 철판의 얼굴이 빨개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집에 갈 때까지 짝꿍은 나를 한 번도 괴롭히지 않았다.

분명 엄마는 협박을 한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저 악마가 천사가 될 리가 없다. 그 날 오후 나는 협박의 전모를 알 수 있었다. "엄마 대체 걔한테 뭐라고 한거야?" "응? 아, 니 짝꿍? 네가 우리 수진이 짝꿍이니? 니가 그렇게 수진이에게 잘 해준다며? 아줌마는 참 고맙단다. 수진이가 전학와서 힘들 때 힘이 되어줬다지? 아줌마가 맛있는거 해줄테니 언제든 놀러와라. 그랬지,뭐"


엄마, 대체 뭐라고 한거야?
-낮은 울타리 2002년 7월호 중에서-



한 푼 두 푼 모아서

퍼스트 유나이티드 감리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주일학교 4학년 아이들에게 난 이렇게 말했다. 2주 동안 1페니 동전들을 모은 다음, 그 돈을 ?애스베리 하우스 차일드 엔리치먼트 센터?에 보내어 저소득층 아이들을 돕자고. 이 아이디어는 1페니짜리 동전 백만 개를 모았다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읽고서 생각해 낸 것이었다. 반 아이들은 이 말을 듣자 자기들도 그만한 액수를 모으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를 설명했다. 1페니 동전 백만 개면 결국 1만 달러인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우리도 할 수 있어요.?라면서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아이들은 지방 신문기자와 교회 직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아이들은 몇 주 동안 성인 주일학교 반들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고, 이 프로젝트는 전 지역의 감리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었다. 1페니 동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난 2~3주마다 15kg 내지 25kg 가량의 동전들을 은행으로 날랐다.
?5년?이라는 기간 동안 ?5톤?의 동전을 모아 목표를 달성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페니 모금 프로젝트에선 마침내 작년에 백만 번째 1페니 동전을 애스베리 하우스에 기부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에 뛰어들고 있는지 잘 몰랐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 밀턴 색슨, 텍사스 주 롱뷰/ 가이드 포스트 8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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