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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버지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1768 추천수:18 112.168.96.71
2014-11-25 13:40:35
오늘도 바닷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털신발을 닮은 자그만 돌 하나를 주웠다. 신기하게도 돌의 밑창은 회색빛 테두리를 둘렀고. 가운데는 검정색이며 맨위는 다시 흰색 테를 둘렀다. 그렇다고 수석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겐 언뜻 연상되는 것이 있어서 주워왔다. 다른 이가 보면 그저 평범한 돌이겠지만 내게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치닫게 하는 신발모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긴 겨울방학이 끝나 개학이 되면 나는 학교가 있는 인천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내가 인천 가는 날, 이른 새벽부터 아버지는 쇠죽을 쑬 겸 내가 자는 방에 군불을 때셨다.

군불을 때시면서 간밤에 땡땡 얼어붙은 내 검정운동화를 아궁이에다 따끈따끈 덥혀 놓으셨다. 그 당시 시골은 얼마나 춥던지 방에 떠다 놓은 자리끼가 꽁꽁 얼고 안방의 물걸레가 동태가 되다시피 하였다. 물 묻은 손으로 쇠문고리를 잡으면 철썩 달라붙을 정도로 추울 때였다. 아침을 일찌감치 먹은 다음 버스정류장으로 아버지와 같이 갔다. 아버지는 내가 먹을 쌀자루와 반찬을 지게에 싣고 앞장을 서셨다. 버스는 우리 집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가파른 비탈길 언덕배기에 정차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시퍼렇게 젊은 아들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무거운 짐 지고 가시는 아버지 뒤에서 쫄래쫄래 아무 생각 없이 뒤따라만 갔으니…. 눈이 와서 미끄러운 빙판 고갯길을 지게작대기로 어정어정 짚으시면서 올라가시던 아버지를 앞지르기라도 하면 고개를 홱하고 돌려, "아버지, 빨리 와요, 버스 다 떠나버리겠어요."하며 아버지를 타박하기까지 했다.

그땐 왜 그리 철없는 못된 자식이었던지…. 게다가 나는 아버지가 훈훈하게 덮혀 주신 검정 새 운동화를 신었고 아버지는 밑창이 다 닮고 뒷축이 해진 털신발을 신으셨다. 밑창이 뺀질뺀질 닳은 신발이니 얼마나 미끄러웠겠는가. 그 당시의 털신발이라야 신발 안에다 담요 같은 좀 두꺼운 천을 깔았을 뿐 지금처럼 털이 부숭부숭해 방한이 잘되는 따뜻한 신발이 아니었다.

내가 탄 버스가 당신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살을 에는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언덕배기에서 빈 지게를 지고 하염없이 서 계시던 아버지. 그렇게 철이 없고 생각이 모자라던 아들 곁을 아버지께서 떠나신 지도 어언 스물세 해! 육남매 뒷바라지만 하시다가 먼저 가신 어머니가 그리우셨던지 부지런히 떠나버리신 아버지, 오늘 아버지의 털신발 같은 돌을 보니 철없는 그때가 생각나 부끄럽기만 하다.

요즘도 동네 노인들이 털신발 신고 가시는 모습을 뵐라치면 추운 겨울 빙판길을 밟아 올라가시던 다 해진 아버지의 신발 뒷축이 어른거린다. 살아 계신다면 용돈을 듬뿍 드리고 싶고, 온천욕도 해드리고 싶고, 한없이 따뜻한 털 신발을 사드리련만 철이 나도 한참 늦게 났으니 목이 메는 그리움 뿐.

-정영인/낮은 울타리 2001년 7월호 중에서 -


무거운 짐진자

그의 핏발 선 눈에서 비장한 결심이 달아오르고 있었다.“그래. 다시 일본에 가는 거야. 가서 돈을 벌어야 해”황00씨는 수첩 속에 보관하고 있던 고향 선배의 주민등록증을 꺼내어 들었다. 은행에 심부름을 좀 해 달라며 선배가 잠시 맡긴 것이었다. 그는 주민등록증의 비닐을 벗겼다. 선배의 사진을 떼어 내고 자신의 사진을 대신 붙였다. 이제 그는 그의 선배가 되었다. 위조한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가짜 여권을 신청해 받았다. 그리고는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는 교포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하루 15시간씩 억척스레 일했다. 그런데 1년 가량 지난 어느 날 공장의 기숙사로 불법체류자 일제단속을 나온 일본 경찰에 의해, 그가 가짜 여권을 소지한 사실이 들통났다. 그는 한국으로 압송된 후 구속되었다. 공문서위조죄 등 무려 10개의 죄명이 붙은 채….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에 자식은 많다고, 그의 형제자매는 10명이나 되었다. 대를 이은 가난 때문에 온 가족이 지지리도 고생했다. 끼니 굶기를 밥먹듯 했다. 아버지는 그가 다섯 살 때 병으로 죽었고, 어머니는 날품을 팔다가 다쳐 불구가 되었다.

그는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입에 풀칠하기 위해 바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주인의 구박과 세상의 조롱에 시달리며 15년 간 머슴살이를 했다. 떠꺼머리 총각으로 서른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앞날이 보이지 않는 쥐뿔같은 인생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그는 일본에 가면 막노동을 해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후 그는 수시로 일본에 나가서 막노동을 해왔다. 2년 전에는 일본에서 비자기간을 넘겨 체류하던 중 단속되어 강제출국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남의 이름으로 일본에 몰래 들어갔던 것이다. 자신의 한스러운 삶을 돌이켜 보던 그는 비수로 살을 베는 듯한 아픔과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애써 참아야 했다.

그의 눈에서는 비질비질 눈물이 비치었다. 앞으로 있을 재판에 생각이 미칠 때면 오싹한 두려움과 함께 아득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20년 전의 아련한 어떤 추억이 떠올랐다. 그가 머슴살이했을 때 스무 살 나이에 동네 교회에서 야학(夜學) 교사들로부터 중학교 과정을 배우던 중 간간이 예수 이야기를 듣던 일이었다. 예수 이야기를 듣던 그때가 행복했었다는 느낌이 그에게 와 닿는 순간, 그는 그 행복을 다시금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는 그 날 구치소에서 드려진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20년 전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예수께서 예배 중에 나타나 따뜻하게 그를 만나 주셨다. 그는 이제 쉼과 평안을 얻었다. 이후 그는 세상의 법으로부터도 용서받았다

-조덕제 변호사/목마르거든 2001년 4월 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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