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마을 열린이야기

열린이야기

게시글 검색
못다쓴 복음서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398 추천수:16 112.168.96.71
2014-11-25 10:10:25
책꽂이에서 두꺼운 대학노트 한 권을 발견하고는 빼들었습니다. 거기에는 또박또박 적어나간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 복음이 살아나 있었습니다.하얀 눈이 유난히도 소복소복 내리던 그날 오후 작은누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0년이 넘는 투병생활을 끝마치고 주님의 따스하신 품에 안긴 것입니다. 신체검사에서 당뇨병 판정을 받았지만, 누나는 여고 졸업과 동시에 직장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집세를 제때 마련하지 못해 살던 방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배고픈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백화점 판매사원으로 시작한 직장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루종일 서있어야 하는 근무인지라 밤에는 다리가 퉁퉁 부어 올라 엉엉 울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누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언제 그랬냐는 듯 출근하곤 하던 속 깊었던 누나. 그런 생활이 화근이었습니다. 병이 악화되어 기나긴 투병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체중이 32~3kg까지 떨어지고, 당이 보통사람의 대여섯 배까지 치솟곤 해서 병원에 실려가기 일수였습니다. 음식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피까지 섞어 가면서 먹은 것을 거의 토하곤 했습니다.

무섭다는 갖은 합병증이 시작된 것입니다. 시력도 차츰 떨어졌습니다. 좋아질 거라는 의사의 말을 따라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결과 오른쪽 눈이 완전히 실명되고 말았고 수술 후유증인지 눈이 푹 꺼진 상태에서 회복이 전혀 되질 않아 보기조차 흉하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온몸이 부어오르고 배에는 물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신장 기능이 마비되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별 수 없이 신장 수술을 받았고, 그때부터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인공 투석을 하루에 몇 번씩 받아야만 했습니다.

11월 어느 날 투석약이 거의 떨어졌으니 새로 주문해달라는 누나의 연락을 받고 한 차 가득 주문하였습니다. 12월 4일 자꾸만 집에 들르고 싶었습니다. 오후에 아내와 다섯달된 아들과 함께 집에 들러 누워있는 누나를 보고 쉬다가 저녁을 먹고는 '또 올게' 라는 한 마디를 남겨 두고 집을 나섰습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영영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이 될 줄은 말입니다. 마루에 가득 쌓아둔 투석약 중에서 한 박스도 제대로 다 써보지 못하고 누나는 그 다음날 영원한 길을 떠났습니다.

세 살 아래인 나에게 유난히 따스하게 대해주고 거의 한 번도 화도 내 본적이 없던 이쁜 작은 누나가 이 세상 소풍을 끝낸 것입니다. 주님 품에 안긴 줄 알면서도, 이제는 피 토하는 그 고통 없는 곳으로 돌아간 줄 알면서도, 영원한 고향에서 안식을 시작한 줄 알면서도 서른 두 해 살면서 제대로 한 번 활짝 피어보지 못한 누나의 세상살이를 생각하니, 서른 두 살밖에 안 먹은 젊디젊은 주검을 대하고 보니 주체할 수 없는 설움이 몰려왔습니다. 엉- 엉- 울었습니다. 무릎 꿇고 뜨거운 눈물 뚝뚝 떨구며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눈감는 순간을 못 지킨 것이 너무 서운해서, 함께 기도도 하고 마지막 길 찬송가도 불러 주고 싶었는데-- 먼저 가 있으라는 작별 인사 한마디 못한 것이 하도 아파서 아직 체온 남아있는 손을 잡고 젖은 가슴을 쳤습니다.'서어언- 자야아아-- 수우수울도 바앗고오-야악도오 자아알 마아자아서어--기언치 사안다아드만-어엄마- 두우고 니 호온자아 가아냐아-- 저 야악이라도 다아아 쓰으고 가제느은-- 서어언자야아-흐흐흐흥--'

늙으신 어머니의 한 맺힌 통곡을, 피맺힌 설움을 가물가물 들으며 눈을 감은 채 주님을 보았습니다. 환하게 웃는 누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병풍 뒤에 눕혀져 있는 누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병풍 뒤로 가 보았습니다. 오- 주님! 누나는 분명 웃고 있었습니다. 미소 띤 얼굴로 가장 평온한 모습으로 눈보다 더 희게 누어 있었습니다. '그래요, 누나. 고통 없는 그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 잘-가-요-누나-.' 온통 하얗던 무등산 바람재에 누나의 마지막 흔적을 뿌리며 너른 하늘 그득히 미소짓고 계시는 넉넉한 주님의 모습과 누나를 다시 한 번 보며 척척한 속외침으로 불러보았습니다. '누우-나아- 자그은-누우-나아-'

일년여가 지난 어느 날 집에 들렀을 때 책꽂이에 꽂힌 대학노트 한 권을 우연히 펼쳐 보았습니다. 반듯반듯 하게 한자 한자 실려나간 복음서가 날아올랐습니다. 그 고통스런 투병 기간 중에 틈틈이 필사해 나간 그 생명의 말씀이, 요한복음 10장 6절을 제대로 못 채우고 멈춘 그 생명의 말씀이.'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못다 쓰고 간 그 복음서. 이젠 제가 마무리 할겁니다. 그 나라에서 다시 만날 누나를 그리워하며 제가 마무리 할겁니다. 그래서 매년 12월 5일이면 바람재에 올라 한자 한자 누나의 흔적 위에 들려주고 싶습니다.(V)

못다쓴 복음서/안상순
-The Voice21중에서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