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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로 찾아오신 분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552 추천수:15 112.168.96.71
2014-11-21 17:50:30
지난 월요일 밤이었어요. 10시가 되어 자리를 펴고 누워 잠이 막 들려고 할 때 개가 시끄럽게 짖어 대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길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도 개가 짖어대었으므로 곧 그치겠거니 하고 누워 있는데 누가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 같았어요. 문을 열고 잠옷 바람으로 나가 보니 웬 노인(60세쯤?) 한 분이 부엌 문 앞에 서서 사람을 찾고 있더군요. "누구세요? 누굴 찾아 오셨나요?"가까이 다가서자 노인의 몸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겨왔습니다. "이 집에 벙어리 살지 않소?" 노인이 이상한 얼굴로 웃으며 나를 쳐다 보았습니다. "여기 벙어리가 살지 않아요? 그를 꼭 만나야 하는데......" "그런 사람 없습니다."

"이 집에 산 지 얼마 됐소?" "석달 되었습니다." "그래요? 벙어리한테 잘 해 주시오." 노인이 알 수 없는 말을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물어왔지요. "어디 살다가 오셨소?" "서울에 살다가 왔습니다." 귀찮고 싫은 마음이 들어서 아무렇게나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반갑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어요. "나도 서울 사람이오!" 순간, 짜증이 났습니다. 서울 사람이니 어쨌단 말인가? 대한민국에 서울 살아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손을 저으며 빨리 말했습니다. "알았어요. 어서 가세요!" 말을 하고 나서 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어서 가라는 말을 하다니, 이렇게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에.

"알았소. 가라니 가야지." 노인이 더듬거리며 등을 돌렸습니다.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들고 있는 텐트 보따리를 가리키며, "이게 있잖소? 아무한테도 폐를 끼치지 않게 이걸 가지고 다니지" 하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를 보내고 방에 들어가 누워있는데, 개가 자꾸 짖고 아무래도 노인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 싶어서 다시 나갔더니 문자 그대로 행방이 묘연이라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어요. 밤새도록 꿈자리가 뒤숭숭했습니다. 입안 가득히 연탄재가 차 있어서 물로 헹구어 내는데 그 물까지 더러운 시궁창 물이어서 고생고생 하다가 잠이 깨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 살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던 그 '벙어리'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얼마나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는지요. 새벽 제단에 나아가 주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님을 미처 알아 뵙지 못했지만 다음에 다시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주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벙어리에다가 소경이었습니다."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내색은 안했지만 며칠 동안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벙어리'에다가 '소경'인 나를 만나러 왔다는 그 노인 모습의 예수님을 한 마디로 문전 박대하여 어두운 밤 비오는 거리로 쫓다시피 돌려보낸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불쌍하고 한심하더군요.

어쩌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보통 사람도 아닌 목사라면서! 목사라고 해서 보통 사람하고 뭐 크게 다를 건 없습니다만, 그래도 하나님,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게 '직업'이면 어디가 달라도 달라야 할 것 아닙니까? 밤새도록 입안 가득 차 있는 연탄재를 헹구지 못해서 고생만 하다가 깼으니 아직도 벙어리인 것은 분명한데 과연 '벙어리'가 무슨 설교를 한단 말인가?노인이 야릇한 미소를 띄며, "그 벙어리한테 잘해 주시오. 내가 그를 꼭 만나야 하는데....." 하고 말하던 모습이 자꾸만 생각났습니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또렷이 생각나면서, 나 자신이 한심스럽다 못해 마침내는 미워지기까지 하더군요.

그런데 지난 주간 어느 날 낮 기도를 드리러 예배당에 갔다가, 또 그 생각이 나서 기도도 못 드리고 멍하니 앉아 있는
데 갑자기 그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뭐든지 지나친 건 나쁘다. 한 번 실수한 것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으면 됐지. 왜 맨날 그 생각만 하고 쓸데없이 괴로워 하느냐? 너무 그러는 것 아니다. 보기 싫구나."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음성이 계속되었어요.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는데 너는 왜 널 용서하지 못하고 그 모양이냐. 너 자신한테도 좀 너그러울 줄 알아라." "주님, 고맙습니다. 정말이지 그날 밤에는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만 제 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게 너의 제 정신이 아니겠느냐?" "옳습니다. 주님, 그게 저의 참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봤으면 됐다. 내가 그날 너를 찾아간 것은 네 모습을 보여 주려고 갔던 것이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어쩌면 그 비오는 밤 노인을 보고 '가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정말이지 제가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갑니다." "괜찮다. 나야 뭐 어딜 가나 환영보다는 푸대접 받는데 이골이 난 몸이니, 그래서 너도 봤지 않으냐? 내가 텐트를 가지고 다니는 것을." "예."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귀에 들리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그러나 확실히 주고 받은 '대화'는 여기서 끝나고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습니다."다음에는 절대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또 다시 어디선가, "큰 소리 치는 게 아니다. 네가 뭘 보고 그렇게 너를 믿느냐?"하고 꾸지람 아닌 꾸지람이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나는 이제 주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과연 그분은 사랑이시라, 나에게 사랑 밖에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아니, 사랑 밖에는 하실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은 지나치게 신비주의자가 된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실 분도 있을 지 모릅니다만 할 수 없습니다.나는 지난 달 그 비오던 밤, 텐트 가방 들고 술 냄새 풍기며 나를 찾아오시어 내 모습을 언뜻 비쳐 보여 주시고 어둠 속에 종적을 감추신 나의 예수님을 앞으로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너그러이 나를 용서하시고 다시 길 떠날 용기를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그날 밤 일로 해서 더 이상 미안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되어서 고마울 뿐입니다.

벙어리로 찾아오신 분/이현주(목사/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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